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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창작자 지원두산 큐레이터 워크숍

세미나 Ⅱ - 최빛나

2024.05.25

세미나 Ⅱ - 최빛나

 

: 변화하는 큐레이팅의 복잡한 생태계 (에이전트/조건/대상/행위/유사 근접 직업 ) 각자의 큐레토리얼 위치를 잡아보고, 동시에 전문직으로서 큐레이터의 정의의 ()가능성에 대해 대화하며 그 과정에서 예술과 문화, 사회, , 정치, 기술, 우주에 대한 – such as artistic life, everybody is a star, universal basic income, three bodies -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지 않되 전문적인 집중을 도모

 

큐레이터의 (불)정의 가능성을 구축해 보기 위한 생태계 다이어그램/지도/그림을 그리며 나눈/남은 이야기, 생각들

-     큐레이터는 직업이다! 직업으로 분류되는 다른 것들과 놓고 보니 큐레이터 또한 노동자의 생태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큐레이터가 직업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으로, 우리는 ‘전시 만들기’를 제시했다. 자기 전시를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것이 누가 큐레이터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척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활동을 통해 큐레이터, 그리고 전시가 문화사의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형성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전시를 만드는 이들이 꾸린 하나의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닐까.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큐레이터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이 즐비해지기를 바란다. (진주)

-     “내심으로는 자기 직업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어찌 깊은 분노와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 직업 계급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레이버, 『불쉿잡』, 19쪽) 큐레이터는 직업인가? 혹시 큐레이터가 ‘불쉿잡(bull shit job)’일 확률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만든 이 단어는 노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겨냥하고 창출하는 바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결국은 무의미한, 심지어는 해롭기까지 한 일자리를 가리키며 사모펀드 CEO, 광고 조사원, 보험설계사, 텔레마케터, 집행관, 법률 컨설턴트 등이 그 사례이다. 자본주의의 심화에 발맞추어 등장한 중개인, 그리고 중개인에 비유되는 큐레이터. 냉혹에서 나아간 잔혹이 도사리는 업계 현황에 고독하기도 잠시, 내가 가진 도구들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기로 한다. (여명)

-     큐레이터를 직업으로 만드는 조건을 이야기했을 때 그 조건이 전시 만들기라면, 어떤 전시를 만드는가? 왜 전시를 만들어야 하는가? 전시를 만드는 목적과 의도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뒤따라온다. 큐레이터, 큐레이팅이라는 말의 쓰임이 다양해진 만큼(어떤 면에선 보다 캐주얼해진 만큼) 전시의 형태도 너무나 다양해졌다. 지난 모임의 말미에 나와 다른 어떤 큐레이터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좋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 보니 나와 다른 어떤 큐레이터도 존재하는 이유와 그 역할이 있다는 생각에 지난 발언을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만 직업으로서 큐레이터가 토대를 두고 있는 (과거, 그리고 변화한 지금의) 조건과 큐레이팅을 비평하는 작업, 진주님이 말했듯 문화사적으로 큐레이팅을 살피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것. 큐레이터와 큐레이팅의 지형을 그리는 일의 중요성이 다시 소환된다. 또한 큐레이터와 유사한, 혹은 큐레이터가 속한 생태계를 함께 만드는 다른 직업들을 생각해 보고 각자의 포지션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어 보았다. (재민)

 

오늘 모임으로부터의 큐레토리얼 아이디어 1줄

-     전시 만들기가 큐레이터의 제1 과업이라고 한다면, 그 노동은 사람과 관계 맺기를 핵심 동력 삼아 움직인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큐레이터의 이 노동은 꽤 긍정적인 방향성을 지닌다. 큐레이터의 일에서 관계 맺기의 과정, 관계 맺기의 결과 자체가 큐레이터의 큐레토리얼 프랙티스의 결정체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계 맺기를 지향할 것인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진주)

-     수많은 양태로 존재하는 전시 중에서, 무엇이 큐레토리얼 프랙티스라고 부를 만한 전시일까? 큐레이터의 자리라고 부를 만한 것은 전시의 생애 중 언제 어디서 형성될까? 큐레토리얼 프랙티스는 무엇을 중개하는가? 이 중개는 중립적이거나 중립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중도적이어야 하는지? (여명)

-     매개자로서의 큐레이터를 상상할 때 저널리즘이 내포한 공정, 소통, 균형 같은 단어들을 떠올려보았다. 이 중에서 균형이 현재의 내가 관심을 두고 지향하는 지점인 듯하다. 완전한 균형이란 건 사실 이상이지만, 나에게 균형은 경계 흐리기, 그리고 의견과 반론이 교환되는 틀을 만드는 것이다. 「중개인」 텍스트에서 나온 “큐레이팅은 ‘예술의 속도(speed of art)’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있다. (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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