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Ⅲ - 최빛나
수정
: 이 글을 사전에 읽고 저희 셋이서 줌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왔던 이야기들이 인상 깊었어요. 스스로 중개인, 매개자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는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었고요.
“중개인에 대한 존재론은 없다”, “큐레이터는 미지의 것을 계속적으로 추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분을 읽으면서, 그럼에도 중개인으로서의 존재론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며, 미지의 것을 추적하는 나의 모습이 두 발을 땅에 모두 딛고 서 있는 형태는 아닐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한 발로 땅을 딛고 다른 한 발은 균형을 잡거나 방향을 바꾸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휘청거리는 모습 같았죠. 두 분은 중개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습을 신체나 사물에 빗대어 본다면 어떤 것이 떠오르실지 궁금해요.
지희
: 이번 글을 읽으면서 ‘중개인’으로서 큐레이터가 예술의 제도적 요구와 자본의 논리 안에서 어떤 ‘상태’에 있는 존재인가를 되물어보게 되었어요. ‘중개인’이라고 하면 저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부동산 중개인인데요. 초자본화된 사회에서는 빈틈을 포착해 자리를 차지한 중간자들이 무한히 증식하면서, 비틀린 구조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윤을 얻는 것이 미덕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전에는 머니트레이너라는 이름으로 자산 관리 컨설팅을 홍보하는 현수막을 길거리에서 봤는데요. 기괴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보이게 하고 가릴 것인지, 무엇을 전할지에 대한 선택이 따르는 매개의 행위에 긴장감, 불안함을 느끼기도 해요. 또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예전에는 삶 속에서 자연스레 향유되던 예술이 중간에서 개념이나 형식을 덧입고 ‘전시’라는 틀과 어법 안에 들어가면서, 더 어렵고 거리가 느껴지는 무언가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완결된 한 권의 책을 입체적으로 올려 세운 것 같은 전시에 대해 점점 불편함을 느끼게 돼요. 전시에서는 누락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눈 유의미한 대화와 이야기, 생각의 조각들, 관계들을 그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열린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요.
결국 ‘중개인’으로서 큐레이터는 자신의 불투명한 위치성을 자각하고, 무엇을 어떻게 중개할 것인가를 반성적으로 고민하면서, 그 안에서 유연하게, 창의적으로 플레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중개인으로서 큐레이터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요. 글쎄요.. 저도 수정님처럼 매달린 구슬처럼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균형을 잡으려는 어떤 운동적인 상태를 떠올렸고요. 한편으로는 파르르 흔들리는 나침반의 바늘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잠깐이나마 뚜렷하게 어떤 방향을 가리킬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요.
수정
: 앞서 말했던 부분에 등장했던 중개인으로서의 존재론에 대해서도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 이 책에서는 큐레이터가 ‘누군가’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매개 안에서의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보았지만, 저는 제가 좀 더 뾰족하게 삐져 나오고 싶은, 튀어 오르고 싶을 때가 있다고 느끼거든요. 저희가 앞으로 만들 출판물을 생각하면서도,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큐레이터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던) ‘저자적 주체’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희
: 때로는 중개함으로써,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갈등을 야기”하고, “합의점을 찾기보다 생각이 어떻게 충돌되는지를 보려고”함으로써 뾰족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는 개인의 수행 자체가 뾰족해진다기보다는 이야기가 뾰족해지는 것에 가깝긴 하겠지만요. 무언가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넓은 연결망에서 더 다채롭게 저항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재미있던 순간 중 하나인, “다같이 모여서 gathering together”*를 언급해보고 싶어요. 스스로를 검토하면서 내 옆의 사람들과 함께 교류할 때 역설적으로 개인으로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쇠렌 안드레아센, 라르스 방 라르센, 「중개인: 매개에 관한 대화의 시작」, 폴 오닐 외, 『큐레이팅의 주제들』(더플로어플랜, 2021), 36